끝없이 그려낸 선 … 고통스러운 반복, 명확한 위안

매일경제 김슬기 기자
앙상한 나뭇가지의 그림자가 강물 위에 드리웠다. 메마른 겨울, 도시 외곽에서 우연히 마주칠 법한 풍경이다. 어두운 채도에 먹으로 그린 '숨'은 이채영 작가(40)가 반복적으로 그려온 나무, 덤불, 저수지, 늪 등을 사용해 만들어낸 현실과 비현실이 뒤엉킨 풍경화다. 풍요로운 도시 외관과 대비되며 낯설고 생경한 감각을 선사한다.

작가는 "구상화 같지만, 제 안에서는 비구상처럼 보이는 풍경이다. 물에 비친 나무는 심연을 표현하고자 했다. 뒤집힌 나무는 내면의 깊은 곳을 은유한다"고 설명했다.

신진 작가를 발굴하는 화랑의 기획전은 한국 미술의 내일을 한발 앞서 볼 수 있는 기회다. 서울 인사동 터줏대감 선화랑이 4월 13일까지 개성 있는 동양 화가 4인을 한자리에 모은 기획전을 연다. 매년 이어지는 '예감' 시리즈의 올해 주제는 '자연 회귀적 열망'이다.

1층에 있는 1전시실은 모혜준 작가(52), 우병윤 작가(36)의 작품으로 꾸몄다. 두 작가는 자신만의 재료와 물성, 행위가 조화하며 반복과 중첩 과정으로 이뤄진 추상적 화면을 선보인다.

모혜준은 미술대를 졸업한 후 사회생활을 하다가 다시 붓을 잡은 늦깎이 작가다. 한지에 검정 펜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선을 반복해 그어 추상적 도상을 만들어냈다. 작가는 작업한 날짜를 제목으로 삼은 '20240307' 앞에서 "복잡해 보이지만 단순하고 반복적인 작업의 결과물이다. 뒤늦게 작가가 됐기에 내가 할 수 있는 노동집약적인 걸 하자 싶어 선택한 방법"이라며 "펜으로 그리는 작업은 고통을 안겨주지만, 반복적인 행위는 명확한 위안을 준다"고 밝혔다.

우병윤은 점, 선, 면, 색 등 기본 조형 요소로 불규칙적인 패턴을 만들어낸다. 석고로 질감을 구현하고 색을 입혀 다시 긁어내는 반복 작업을 하며 무질서하면서도 조화로운 화면을 완성했다. 미술대를 다니지 않고 독학으로 작업해온 작가는 로스앤젤레스 헬렌제이, 프란시스갤러리 등 해외에서도 전시를 열어왔다. 그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적인 것을 찾기 위해 작업한다"면서도 "추상적인 화폭 속에서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조화와 균형"이라고 말했다.

2층 2전시실에는 이상덕 작가(42)와 이채영 작가의 작품이 걸렸다. 두 작가는 본인의 시각적 경험과 기억에서 기인한 풍경을 묘사하며 심상을 담아낸다.

이상덕의 작업은 얼핏 노이즈가 생긴 디지털 화면을 보는 것 같다. 컴퓨터로 이미지를 정교하게 구성한 뒤 이를 아크릴 물감과 먹을 섞어 채색한 엄연한 그림이다. 작가는 "디지털 기기가 우리 감각을 흩어놓는 것처럼 의도적으로 착시를 설계했다"고 전했다. 기법적으로도 의미를 담았다. 그는 "콜라주를 선택한 게 의미 있다"며 "층을 쌓으면서 여백을 통해 드러내기도 하고, 입체적이고 물리적인 화면을 구성했다. 평면 조각이라고 불러도 좋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