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들 사이를 소요(逍遙)하는 즐거움 : 여성 채색화가들의 자연 풍경화
김이순(미술비평/미술사)
최근 한국 화단에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현상은 채색화의 약진이다. 채색화의 역사는 매우 길지만, 현대 한국 화단에서 채색화는 수묵화에 비해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채색화의 붐이 일고 있는데, 그 가운데 흥미로운 지점이 발견되어 《풍경들 사이를 소요(逍遙)하는 즐거움 : 여성 채색화가들의 자연 풍경화》라는 타이틀의 전시를 기획하게 되었는데, 요컨대, 여성 채색화가의 약진과 자연 풍경화의 부상이 그것이다. 따라서 이번 전시에는 이숙자(1942년생), 김인옥(1955년생), 유혜경(1969년생), 이영지(1975년생), 이진주(1980년생), 김민주(1982년생)를 초대하게 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내용에 주안점을 두었다.
첫째, 초대된 채색화가들이 채색화에 대한 인식이 어떠한가, 즉 왜 채색화를 그리는가를 살펴보고자 했다. 이러한 면모는 이번 전시 작품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한국 채색화 논의에서 중요한 지점이다.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채색화는 왜색으로 폄훼되었는가 하면 ‘민족의 얼’이 담긴 그림이라는 평가가 있다. 이러한 상반된 평가는 연구자에 따라 각각 다른 시각으로 채색화를 접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채색화에 대한 작가 자신들의 인식이다.
그러면 이번에 초대된 채색화가들은 채색화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흥미롭게도 이들 간에 채색화에 대한 개념과 인식이 조금씩 다르다. 이숙자나 김인옥처럼 1960-70년대에 미술교육을 받은 세대는 채색화를 수묵화의 상대개념으로 인식한 상태에서 전통 채색화의 재료와 기법을 충실하게 따른다. 말하자면, 채색화가 지닌 역사성이나 상징성을 의식하면서 채색화를 그리는 작가들이다. 특히 이숙자는 일찍이 ‘한국화’ 정립을 위한 연구를 시작했고, 채색화를 통해 한국성을 모색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 작가이다. 이에 비해, 김인옥의 경우는 채색화에서 한국적인 정체성을 찾으려는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출하지는 않는다. 다만 전통 채색 안료와 기법을 고집하면서 정통 채색화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작가이다. 반면, 2000년대에 미술교육을 받은 세대의 작가들은 한국 현대화단에서 채색화라는 장르가 함의하는 역사성이나 정체성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의 심상과 감정을 표현하기에 여타의 매체보다 더 적합하다는 판단하에 전통적인 채색 안료를 선택한다. 채색화 제작 과정이 매우 수고스럽기는 하지만, 효과 면에서 그런 어려움을 감내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전통적 재료와 기법을 고수하는 것이다. 유혜경과 이영지가 그러한 경우다. 이번 초대 작가 중에서 가장 젊은 작가인 김민주는 한발 더 나아가, 표현 재료를 굳이 전통 안료로 한정하지 않는다. 수채화 물감이나 과슈, 아크릴 물감, 파스텔 등 여러 재료를 사용하면서 채색화의 확장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또 이진주는 전통 안료에 아크릴 물감을 혼합하여 만든 자신만의 고유한 수제 물감인 ‘검은 색(JBblack)’을 사용하기도 한다.
둘째, 여성 채색화가들의 약진에 주목했다. 이번 전시에 초대된 작가들은 이숙자 화백처럼 원로 작가가 있다. 이 작가는 한국 채색화가로는 처음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어준 작가로, 한국 채색화의 중심에 있는 작가다. 김인옥은 올해만 해도 초대 개인전이 여러 차례 열었으며, 그 외의 작가들 역시 개인전을 지속적으로 열고 있다. 또한 굵직한 채색화 기획전에 초대되는 작가들이다. 현재 파주 아트센터 화이트블럭에서 열리고 있는 《아아! 동양화 : 이미·항상·변화》(7.14~10.9) 전시에 이진주 작가가 포함되어 있는가 하면, 이천시립월전미술관 《요괴백과도》(8.3~10.8) 전시에는 유혜경 작가와 김민주 작가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면 이 여성작가들이 관심 있게 다루는 주제는 무엇일까. 채색화라면 흔히 인물화나 민화 등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자연 풍경을 즐겨 다루고 있는데, 그 내용은 ‘소요유(逍遙遊)’로 읽힌다. ‘소요유’는 전통 수묵산수화에서 중요한 개념이다. 조선 시대뿐 아니라 근대 수묵산수화를 살펴보면, 그림을 그린 화가,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 감상자들은 대부분 남성이었다. 이번 전시에 초대된 여성 채색화가들의 자연 풍경화는 이러한 전통을 비틀기라도 하듯이 여성적 시각이 내재되어 있다.
‘소요’는 장자에서만 보이는 특징적 개념으로, 세상사에 참여하기보다는 자연 속에 묻혀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즐겁게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유(遊)’ 개념과 관련되는데, 여기에서 ‘유’는 단순한 유희를 의미하지 않고 자유로운 활동을 승화시킴으로써 얻는 정신의 해방을 의미하며, 세속에 살면서도 세속적인 것이나 인위적인 것에 지배당하지 않고 자신의 자유를 추구함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 ‘소요유’에 대한 지향은 인간 누구에게나 내재된 보편적 욕망이며, 특히 복잡한 현실의 고통에서 자신을 지켜줄 도피처를 필요로 하는 현대인들에게 절실한 태도이다.
이번 기획전에서 관람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단 한 가지, 상상력이다. 작가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관람자와 소통하기를 원한다. 각자의 경험과 생각 등을 토대로 작가가 작품을 제작하는 동안 상상하고 고민했던 것들을 상상하며 작품 속을 ‘소요’하길 바란다.
김이순(미술비평/미술사)
최근 한국 화단에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현상은 채색화의 약진이다. 채색화의 역사는 매우 길지만, 현대 한국 화단에서 채색화는 수묵화에 비해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채색화의 붐이 일고 있는데, 그 가운데 흥미로운 지점이 발견되어 《풍경들 사이를 소요(逍遙)하는 즐거움 : 여성 채색화가들의 자연 풍경화》라는 타이틀의 전시를 기획하게 되었는데, 요컨대, 여성 채색화가의 약진과 자연 풍경화의 부상이 그것이다. 따라서 이번 전시에는 이숙자(1942년생), 김인옥(1955년생), 유혜경(1969년생), 이영지(1975년생), 이진주(1980년생), 김민주(1982년생)를 초대하게 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내용에 주안점을 두었다.
첫째, 초대된 채색화가들이 채색화에 대한 인식이 어떠한가, 즉 왜 채색화를 그리는가를 살펴보고자 했다. 이러한 면모는 이번 전시 작품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한국 채색화 논의에서 중요한 지점이다.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채색화는 왜색으로 폄훼되었는가 하면 ‘민족의 얼’이 담긴 그림이라는 평가가 있다. 이러한 상반된 평가는 연구자에 따라 각각 다른 시각으로 채색화를 접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채색화에 대한 작가 자신들의 인식이다.
그러면 이번에 초대된 채색화가들은 채색화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흥미롭게도 이들 간에 채색화에 대한 개념과 인식이 조금씩 다르다. 이숙자나 김인옥처럼 1960-70년대에 미술교육을 받은 세대는 채색화를 수묵화의 상대개념으로 인식한 상태에서 전통 채색화의 재료와 기법을 충실하게 따른다. 말하자면, 채색화가 지닌 역사성이나 상징성을 의식하면서 채색화를 그리는 작가들이다. 특히 이숙자는 일찍이 ‘한국화’ 정립을 위한 연구를 시작했고, 채색화를 통해 한국성을 모색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 작가이다. 이에 비해, 김인옥의 경우는 채색화에서 한국적인 정체성을 찾으려는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출하지는 않는다. 다만 전통 채색 안료와 기법을 고집하면서 정통 채색화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작가이다. 반면, 2000년대에 미술교육을 받은 세대의 작가들은 한국 현대화단에서 채색화라는 장르가 함의하는 역사성이나 정체성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의 심상과 감정을 표현하기에 여타의 매체보다 더 적합하다는 판단하에 전통적인 채색 안료를 선택한다. 채색화 제작 과정이 매우 수고스럽기는 하지만, 효과 면에서 그런 어려움을 감내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전통적 재료와 기법을 고수하는 것이다. 유혜경과 이영지가 그러한 경우다. 이번 초대 작가 중에서 가장 젊은 작가인 김민주는 한발 더 나아가, 표현 재료를 굳이 전통 안료로 한정하지 않는다. 수채화 물감이나 과슈, 아크릴 물감, 파스텔 등 여러 재료를 사용하면서 채색화의 확장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또 이진주는 전통 안료에 아크릴 물감을 혼합하여 만든 자신만의 고유한 수제 물감인 ‘검은 색(JBblack)’을 사용하기도 한다.
둘째, 여성 채색화가들의 약진에 주목했다. 이번 전시에 초대된 작가들은 이숙자 화백처럼 원로 작가가 있다. 이 작가는 한국 채색화가로는 처음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어준 작가로, 한국 채색화의 중심에 있는 작가다. 김인옥은 올해만 해도 초대 개인전이 여러 차례 열었으며, 그 외의 작가들 역시 개인전을 지속적으로 열고 있다. 또한 굵직한 채색화 기획전에 초대되는 작가들이다. 현재 파주 아트센터 화이트블럭에서 열리고 있는 《아아! 동양화 : 이미·항상·변화》(7.14~10.9) 전시에 이진주 작가가 포함되어 있는가 하면, 이천시립월전미술관 《요괴백과도》(8.3~10.8) 전시에는 유혜경 작가와 김민주 작가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면 이 여성작가들이 관심 있게 다루는 주제는 무엇일까. 채색화라면 흔히 인물화나 민화 등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자연 풍경을 즐겨 다루고 있는데, 그 내용은 ‘소요유(逍遙遊)’로 읽힌다. ‘소요유’는 전통 수묵산수화에서 중요한 개념이다. 조선 시대뿐 아니라 근대 수묵산수화를 살펴보면, 그림을 그린 화가,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 감상자들은 대부분 남성이었다. 이번 전시에 초대된 여성 채색화가들의 자연 풍경화는 이러한 전통을 비틀기라도 하듯이 여성적 시각이 내재되어 있다.
‘소요’는 장자에서만 보이는 특징적 개념으로, 세상사에 참여하기보다는 자연 속에 묻혀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즐겁게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유(遊)’ 개념과 관련되는데, 여기에서 ‘유’는 단순한 유희를 의미하지 않고 자유로운 활동을 승화시킴으로써 얻는 정신의 해방을 의미하며, 세속에 살면서도 세속적인 것이나 인위적인 것에 지배당하지 않고 자신의 자유를 추구함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 ‘소요유’에 대한 지향은 인간 누구에게나 내재된 보편적 욕망이며, 특히 복잡한 현실의 고통에서 자신을 지켜줄 도피처를 필요로 하는 현대인들에게 절실한 태도이다.
이번 기획전에서 관람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단 한 가지, 상상력이다. 작가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관람자와 소통하기를 원한다. 각자의 경험과 생각 등을 토대로 작가가 작품을 제작하는 동안 상상하고 고민했던 것들을 상상하며 작품 속을 ‘소요’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