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y with me : 이영지

12 May - 8 June 2023
’영지정원‘에서의 유유자적

이재언 [미술평론가]

Ⅰ. 영지정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누구나 치유가 필요할 때 편안하게 들르면 됩니다. 이곳은 한 아티스트가 25년 전 주말농장처럼 소박하게 나무랑 꽃이랑 가꾸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중세장원(manor)이나 공원처럼 규모가 커졌네요. “무의식중에 점을 찍고 점이 선이 되고 선이 면이라는 공간이 되는데, 나무도 보잘것없는 것부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에 풍성한 한 그루의 나무가 돼 있다.”(작가 노트) 길도 내고, 벤치도 마련했으며, 집이랑 교회당도 짓고, 호수도 파고.... 이곳은 ‘영지정원’이라 불러도 좋을 겁니다. 이곳엔 식물도감에 새로 등재되어야 할 ‘영지나무’가 가득합니다. 원산지가 ‘영지’라는 이름이 들어간 학명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혹시 알고 계세요? 이 작가는 보이는 곳보다, 보이지 않는 데서 더 진지함과 에너지를 쏟고 있습니다. 사람이 눈으로 보는 것이 다가 아니며, 진리란 것도 고민하여 찾는 사람에게만 실체를 드러내는 불가사의한 것이라 여기는 게지요.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그는 잎이 무성할수록 뿌리의 수고와 헌신을 생각합니다. 여러분들도 그림 속 나무의 잎만 보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작가는 땅속의 보이지 않는 뿌리까지도 깊이 사유하며 잎새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의 뿌리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들어볼까요?

“차갑고 어두운 하데스의 땅속은 생명을 키우는 일이 사람의 소관이 아닌 신의 소관이자 경지인 것을 일깨워줍니다. 뿌리를 한치만 뻗고자 해도 얼마의 수고를 바쳐야 하는지 아세요? 셀 수도 없는 흙 알갱이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타협을 해서 바늘귀보다 좁은 틈으로 촉수 같은 잔뿌리들을 키워나가야 하는 겁니다. 때론 바람이 고마울 때도 있어요. 나무가 흔들릴 때 땅과의 틈새를 좀 더 넓혀주기도 하거든요. 그땐 좀 살기가 수월해지죠. 다년생 식물들은 물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하지만 비보다는 눈이 더 좋아요. 비는 땅을 적시기는 하나 종일 내려도 한 자 밑 땅속으로 흘러 내려가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겨우내 쌓인 눈은 조금씩 조금씩 흘러내려 온 뿌리를 적셔줍니다. 물을 위해서라면 추위쯤이야 견디어야죠. 우리 대지의 모든 식물이 그런 수고를 끊임없이 해야만 키도 커가고 잎과 꽃도 만들며, 비바람을 능히 견딜 수 있는 굳건한 나무가 되게 하지요.”(필자의 상상노트) 양금택목(良禽擇木)이랄까, 예쁜 새가 아름다운 숲을 찾는다더니, 그 새들이 좋은 나무들을 알아보네요. 사람의 생각을 읽을 줄 아는 유황앵무 같은 하얀 새들이 떼지어 찾아와 둥지를 틀었네요. 고요한 정원에서 유일하게 수다스럽고 움직임이 많지만, 당신이 먼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 친구들이 마음을 읽고 말을 거는 신비로운 친구들이랍니다. 꼼꼼히 집중해서 보면 은하수도 보이고 반딧불이도 보일 겁니다. 그것들 인지하는 순간 이미 여러분들은 요정들의 친구가 되는 겁니다.....

Ⅱ. 우리 K-아트가 세계무대로 진출을 서둘러야 할 시점이다. 하지만 진단해 보건대 아직 미비한 점이 많다. 그중 가장 심각한 것이 작가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렇게 말하면 좀 의아하게 생각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필자도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의 시장 규모나 사회적 수요에 비해 작가가 너무 많이 배출되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여러 아트페어 등 현장에서 보면, 우리 화단에 경쟁력 있는 작가가 의외로 많지 않음을 실감하게 된다. 특히 우리의 정체성을 가장 직접적으로 고수하고 있는 한국화 경우 더 심하다.

반세기 전만 하더라도 한국화는 미술시장의 주축이었다. 나름 팬덤도 확보한 걸출한 작가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화려한 과거와 달리 지금은 많이 위축돼 있다. 재능이나 감각이 있는 학도들이 웹툰이나 애니메이션 같은 인기 분야로 대거 이동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무엇보다 긴 수련 과정이 요구된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게다가 강한 자극을 경쟁력으로 삼고 있는 동시대 미술의 속성을 감안했을 때, 한국화의 내공이나 뚝심만으로는 잘 통하지 않을 때가 많다. 시대의 변화무쌍한 미감이나 다양성의 양상들에 대처할 수 있는 시야와 유연성이 요구된다.

이제 무언가 한국화 본연의 가치가 재정립되고 탐구되어야 할 시점이다. 이유는 단 하나,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는 우리 문화의 모토, 바로 그 중심에 한국화가 놓여 있으며 기대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채색 한국화가 이영지는 바로 우리 한국화의 위상과 방향을 가늠하는 데 있어 좋은 표본이다. 작가에게 차기 K-컬쳐의 바톤을 맡기고자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딱 한 가지만 꼽으면 될 것 같다. ‘우리’에 기반한 치유의 콘텐츠들이 세계인들에게도 똑같은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남양주 미사리에 있는 작가의 작업실에 다녀왔으며, 거기서 느낀 소감을 몇 자 적어본다.

끝없는 점과 선으로 뒤덮인 이영지의 채색화 세계. 평범한 대지에서 광물을 캐듯, 평범한 소재나 대상에서 시학과 미학을 추출해내는 발군의 내공을 담고 있다. 나무도 나무 나름이다. 이 땅에 널린 나무들 가운데 수형이 빼어난 나무, 수령이 오랜 나무, 기품이 넘치는 나무 등 얼마나 많은가. 그 많고 많은 나무들의 다양한 외관과는 달리 수령도 오래돼 보이지 않는 나무들, 특히 그 이름도 정체도 알 수 없는 나무들이 대부분이다. 그 나무들은 현실 속에 있기보다는 관념이나 상상 속에 있는 것들이다. 무수한 점들과 선들로 환원되는 기호화된 나무들이다. 생태나 이미지상으로 사람을 닮은 혹은 의인화된 나무일 수도 있고, 인간의 마음을 간직한 나무일 수도 있다.
나무, 꽃 못지않게 작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또 있다. 바로 허공 혹은 여백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더 비중 있게 생각하는 작가에게 너무도 당연한 문제로 보인다. 이 대목은 채색화와 수묵화를 절충적으로 타협시키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의 화면 속 여백은 대부분 옅은 수직의 먹선들이 누적되어 있다. 얼핏 보면 비가 오는 모습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다의적 공간으로 보인다. 화면이라는 신체의 기관 아닌 기관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없음’은 ‘있음’의 또 다른 의미로 이해하는 고유의 변증적 세계관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의미도 의미지만 그것은 화면을 깊이 있게 하는 장치로 보인다. 이 선들은 담묵 갈필의 수직선으로 비교적 가지런하게 그어져 있다. 속도에 따라 농담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 정적인 화면에 생동감과 그윽한 안정적 색감을 주고 있다. 주연은 아니지만, 결코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여백은 무수한 형용사로 기술될 천의 얼굴을 지니고 있지만, 천성이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고 그저 사람의 직관과 감성에 유독 친근하게 반응하는 부분이다.

그림을 조금이라도 직접 그려본 사람은 안다. 모필로 길이가 길고 일정한 필선을 그려나간다는 것, 특히 자 같은 도구를 쓸 수도 없이 같은 선을 계속 반복적으로 그려나가는 것이 얼마나 수고스러운 일인지 말이다. ‘인고의 미학’이라 말하고 싶다. 어깨를 고정하여 일정한 힘과 속도로 전신을 움직여줘야 하는 전신 지문(指紋)--작가의 혼과 인격이 투영된--과 같은 고행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어두운 땅속에서 삶을 영위하기 위한 뿌리의 치열한 선(線)운동에 비견된다. 화면의 질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면서 관객의 자유로운 상상력과 상호작용을 촉발하는 수행에서 뿌리 이야기가 빠질 수는 없을 것이다.

Ⅲ. 좀 진부한 이야기 같지만, 작가의 철학이나 태도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작품에 대한 애호가 대중의 취향은 각각 다를 수 있지만, 작품에 배어나는 내면세계에 대한 직관적 반응이라는 것은 대체로 비슷할 것이다. 대중의 감각과 취향이 과거와 확연히 다르다.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형성된 교양의 수준이 질적으로 달라졌다. 의미를 좀 놓치는 경우가 있을 수는 있지만, 작가가 얼마나 진지하고 성실했는지는 금방 알아챈다는 뜻이다.
단순히 시각적 측면에서 볼 때, 여백의 유현한 깊이를 구현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성공한 거다. 그런데도 더 나아가 필선의 행위를 수고스럽게 수행하는 것, 그것은 관객에게 독해할 권리를 더 부여하려는 데서 오는 것 아닐까. 관객이 작품에 참여하는 장으로서 말이다. 웅장한 일필휘지로서가 아니라, 온화하고 진지한 인격과 태도로 관객을 만나고자 하는 겸허함이란 결코 진부한 이야깃거리가 아닐 것이다. 이는 교과서적으로 잘 훈련 받고, 성격적으로도 올곧은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요컨대 이영지가 정성스럽게 가꾸고 있는 이 유토피아 같은 정원은 치유와 웰빙의 안식처다. 이 판타지 같은 정원의 방문자들에게 그 어떤 부담이나 긴장을 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극 자체도 가급적 억제하는 가운데, 상처투성이인 내면을 회복시켜 정상적이고 평온한 자아로 복귀시키는 마법을 발휘한다. 그러고 보면 필자가 ‘영지나무라 부르는 화면 속 나무들과 꽃들은 관객의 정서를 순화시키는 데 최적화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 목적으로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배양시켜온 식물들인 셈이다. 하여 그는 ’영혼의 정원사‘라는 라이선스를 보유한 아티스트라 불러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