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적 시각으로 공간을 경험하는 방식 : 침잠과 역동
하계훈(미술평론가)
공간은 기본적으로 3차원 현상이다. 평면에 높이를 더하면 공간이 된다. 먼저 작은 공간에서 시작하면, 찻잔은 차를 가득 담을 수 있는 부피만큼의 공간을 가지며, 도시에서 우리 가운데 상당수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주거 공간은 대체로 30평 남짓한 평면에 2.2-30미터의 천장 높이를 가진 공간이다. 상암월드컵경기장은 큰 지름이 300미터를 조금 넘는 지하 1층에 지상 6층으로 된 타원형 공간이며 그곳에 축구 선수들과 66,000명 정도의 관중, 그리고 그들의 함성을 담은 부피만큼의 공간을 가지고 있다. 다양한 공간 가운데 20세기에 들어서면 우주공간이라는, 우리가 대부분 경험해 보지 못했으나 실재하는 공간이 우리를 둘러싼 새로운 공간으로 부상하고 최근에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메타버스와 같은 4차원적 공간도 현실에서 확장된 공간으로 편입되고 있다.
원시시대 동굴에서 시작한 인류 생활의 진화는 공간의 점/소유와 그 공간을 누리는 방식의 변화가 전개되는 역사로 볼 수 있다. 초기의 공간은 오로지 생존을 위한 공간이었겠지만 점차 공간은 확대, 개선되어 가고 생존이 아닌 편의와 생활의 공간으로 설계, 장식되면서 확장 변화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개인의 공간이 이러하다면, 공공의 공간은 그 규모가 더 크고 개방적이며 확장적이다. 한 마을, 한 도시, 한 나라, 그리고 한 대륙. 게다가 이제는 메타버스처럼 실제로 그 공간을 물리적으로 경험해 보지는 않았지만, 그 존재를 부정하기 어려운 공간과 지구를 넘어서 수십만 킬로미터 밖의 우주공간이 우리 생활에서 종종 사고와 환상을 자극하기도 한다. 실제로 그곳에서는 초강대 국가 간의 세력 대결의 장이 펼쳐지기도 한다. 이러한 공간은 물리적으로는 지배력이고 생산력이면서 정신적 힘이며 종교적 권위이기도 하였다.
공간을 지배하는 자가 곧 힘센 강자이자 승리자로서 약자와 패배자를 지배하고 그들의 공간을 빼앗기도 한다. 승자는 그 공간을 굽어보고 패자는 공간을 지배한 승자의 시선에 복종하며 수동적 자세를 내면화하다가 굴욕의 임계점에서 반발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연 화가들은 우리들의 삶에서 변천을 지속해 온, 이처럼 다양한 공간을 어떻게 인지하고 느끼며 자신들의 작품에 담아왔을까? 필자는 작가들이 공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체험하고 기억하며, 때로는 관람객과 공유하거나 심리적으로 소유하려고 시도했는가에 관심을 둔다.
초상화나 정물화, 그리고 역사화의 배경 속에는 해당 인물과 정물의 의미와 주제로서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이 전개되는 공간에 대한 묘사는 오랜 역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롯이 공간의 재현을 위한 풍경화의 등장은 상대적으로 그 탄생이 비교적 늦었다. 일찍이 서양에서의 의미 있는 풍경화의 등장은 17세기 네덜란드의 황금기와 종교개혁에 접점을 두고 있는 작품들이나 그 무렵부터 시작되어 18세기에 절정을 이루는 영국 중심의 산업혁명과 그랜드 투어(Grand Tour)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과거부터 인간은 상대를 지배하고 우위에 서는 방법을 찾아왔다. 그래서 돌멩이로 상대를 제압하던 시대가 청동기, 철기로 이어지고 급기야 활과 투석기, 그리고 총과 대포 등의 힘으로 한쪽이 다른 쪽을 지배하는 역사가 이어져 왔다. 전쟁은 자본과 결합하여 괴물 같은 몸집을 불려 왔고 이리한 싸움과 대립의 한편에서 발생하는 파괴와 희생의 비극에 대응하는 균형추로서 ‘평화’를 강조하는 주장과 행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선언적 구호로서의 평화는 언제나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는 명분에 제압당해 온 것이 실질적인 인류의 역사다. 이러한 공간 변화의 역사적 전개에서 일부 프로파간다 작가를 제외하면 작가 대부분은 ‘인간적인 것’을 버리지 않고 오랫동안 평화와 안정의 편에서 사회문화적으로 이바지해 왔다.
그렇다면 작가들은 이러한 현실을 살아가면서 어떠한 시선으로 자신들의 공간을 바라보고 있을까? 작가들은 우리의 삶과 연관된 도시공간과 전원 풍경을 묘사한 작품들을 셀 수 없이 많이 남겼다. 그 가운데 한 예를 들자면 이탈리아 미래파 화가 움베르토 보치오니가 그린 <도시가 봉기한다>(1910)에서 도시의 공간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솟아오르며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휘몰아친다. 그런가 하면 17세기 프랑스 화가 클로드 로랭의 풍경화 안에는 서양인의 이상향인 아르카디아를 꿈꿔볼 수 있는 장면이 화면 가득 펼쳐지기도 했다. 동양화가들의 산수풍경은 대부분 이전과 같이 잔잔하고 명상을 유도하기에 적합한 침잠과 사유의 공간으로 묘사되어 있다. 일부 비판적인 의견에서는 서양의 풍경화와 대응 관계에 있는 동양적 풍경화인 산수화를 통한 공간의 해석은 지극히 관념적이며 정신성을 강조하고, 도피적이라는 지적까지 논쟁적으로 언급되고 있으나 이번 논의에서는 여기까지 담론의 확대를 유보하고자 한다.
이번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미술사에서 중요한 화두를 도출할 수 있게 해주는 공간에 대해 각자의 관점에서 나름대로 경험과 해석을 거쳐 작품 안에 독특한 시각을 이미지화하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공간을 다루는 풍경화는 추상적이기보다는 사실적 기록과 재현에 바탕을 두고 전개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의 작품 경향도 자연스럽게 재현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다만 그러한 재현에 있어서 직설적이고 극사실적인 재현보다는 미술사적 흐름을 염두에 두고 작가의 생각을 모티브에 투과시켜 나름대로 미학적 관점에서 작품을 제작하고 있으므로 해서 은유와 상징이 가미되거나 반쯤 추상화되어 사유적이며 서정적인 정서가 드러나는 작품들도 포함된다.
도시와 자연이라는 두 가지 대표적인 공간은 서로 대조적 혹은 대립적으로 비교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도시의 확장은 자연의 축소와 함수관계에 있다. 물론 양자의 절충 방식으로 도시 외곽의 일정 지역을 절대 녹지지역인 그린벨트로 지정한다든지 도시 속의 공원과 같은 쉼터 공간을 조성하기도 한다. 도시 대부분은 강을 끼고 형성되어 왔기 때문에 강이나 바다와 같은 수계(水界)를 접점으로 두 공간이 해석되거나 비교되기도 한다. 바다와 강은 때때로 자연 방어 도구로 이용되어 폐쇄와 보호를 상징하기도 했지만, 다른 시각에서는 생명이며 연결이고 종교적 정화이기도 했다. 그리고 근대 이후 평화적 공간에서는 도로나 교량 건설 기술에 힘입어 두 공간이 분리를 극복하고 하나로 결합하여 도시 생활 공간을 확장하기도 한다.
출품작 가운데 윤정선의 <한강공원>은 여의도 수변공원 쪽에서 강 건너 마포 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파노라마식으로 펼쳐져 있다. 수평으로 넓게 펼쳐진 공간에는 격렬한 움직임이나 난폭한 공격성 같은 동적 요소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회청색 하늘과 그 하늘이 잔잔한 강물에 비친 양 끝에는 강을 사이에 둔 두 지역을 연결하는 다리가 마치 양팔을 벌려 화면을 감싸려는 듯 펼쳐지며 언뜻 강물 위로 반사되고 있다. 아마도 다리 위로 빠르게 자동차들이 오가고 어떤 이는 가쁜 숨을 내쉬며 다리를 건너 조깅을 할 수도 있지만 먼 곳에서 이 공간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지극히 정적이고 평화주의적이며 속도와 행동보다는 명상을 유도하는 침잠의 시선이 담겨있다. 작가는 자신이 체류한 공간에서 촉발되는 정서를 파스텔 색조의 잔잔한 묘사로 추억하는 작품들을 주로 제작해 왔는데, 이 작품도 그러한 창작의 맥락 안에서 탄생하였으며, 그래서인지 지난해에 세상을 떠난 여류시인 김남조와의 2인 시화전에서 원로 작가의 서정적 시와 나란히 전시된 적도 있다.
그런가 하면 김동욱의 <노을 진 한강 다리>에서는 작가가 거의 같은 한강이라는 공간을 응시하고 있으면서도 그 시선은 사뭇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해준다. 윤정선과 달리 김동욱은 합정동 쪽에서 건너편 여의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침잠보다는 역동을 일으키는 물활론(hylozoism)적 시선이다. 석양빛을 담은 하늘과 그 하늘을 반사하는 강물뿐 아니라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의 상판도 마치 거대한 용이나 뱀과 같은 생명체의 돌진을 연상시키는 속도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의 여파는 다리 밑을 흐르는 강물의 흐트러진 물결로 그 역동성이 더해진다. 석양을 배경으로 작은 실루엣으로 표현된 여의도의 건물들이 금세라도 이 거대한 교량이라는 괴물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먹잇감으로 전락할 것만 같다. 이 거대한 역동에 휘말려 화면 오른쪽 아래 강가의 산책로는 휘어지고 그 구석에 선 두 인물은 흠칫 놀란 듯 걸음을 멈추고 서 있다. 김동욱의 공간은 작가의 기억에서 소환되어 활성이 주입됨으로써 역동이 일어나는 그런 공간이며 작가는 여기에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촉매자로서 빠른 붓놀림을 가미하고 있다.
물가의 공간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독특한 시선은 공성훈의 작품에서도 발견된다. 작가는 자신의 생활 공간을 일기처럼 작품에 담아왔다. 그 가운데 부산과 제주도를 여행하면서 실제로 체험한 공간의 분위기를 담아내려던 작가는 그 공간에 스며든 초자연적인 정신성과 감흥을 몸소 체험하고자 했다. <바닷가의 남자>에서 보는 것처럼 이 무렵의 공성훈의 풍경화들을 관통하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햇빛을 극히 제한적으로 화면에 도입하면서 짙은 단색조의 대형 화면에 명암의 대비를 극적으로 표현하여 원인 모를 긴장감과 불안감을 입혀놓는 상황을 반복적으로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작품 속에 표현된 시간은 동트기 전이나 일몰 즈음의 어둠을 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러한 풍경은 사진의 사실성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심리적이고 상징적인 의미가 주입된 이중적인 화면을 형성하게 되고, 그 지점에서 우리는 공성훈의 작품이 일반 풍경화들과의 차별성을 확보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작품에는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으면서도 왠지 낯설고 기이하며 사실적이면서도 현실에서 한 걸음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교묘한 양면성과 반전이 감지된다는 특징을 담고 있어서 일부에서는 낭만적 숭고미나 서정성을 읽어내기도 한다. 필자는 2019년 대구미술관에서 열린 작가의 이인성미술상 수상 기념 전시에서 이러한 공성훈의 풍경화를 징후적(symptomatic) 풍경이라고 부른 적이 있다.
작가 대부분은 일상에서 접하는 익숙한 풍경을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재현하기보다는 그러한 풍경에서 발생하는 낯선 경험과 내면의 심리를 작품에 담아내는 경우가 많다. 이만나의 경우도 무심히 바라보아 온 장면이 어느 순간 낯설게 다가오는 당혹감의 저변을 탐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기억과 감성을 도입한다. 작가는 자신에게 불쑥 다가온 장면과 공간에 대하여 기억을 정리하고 감정을 추스르며 새롭게 의미를 도출해 내는 작업의 과정으로서 수없이 작은 붓 터치를 겹겹이 화면에 올리면서 추억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 사이의 그 어느 지점에서 접점을 찾을 때까지 때로는 독백을, 또 때로는 작품 속의 모티브들과 긴 시간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그 대화의 끝에서 작품이 탄생하여 우리에게 다가온 작품 속에서 관람자들은 작가와 그가 마주쳤던 공간과 나눈 긴 대화를 우리가 눈으로 들어보는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번에 출품된 <더 이상 거기에 없는 풍경>은 공간에서 시차에 의해 작가의 심안(心眼)으로 들어온 장면에 대한 기억의 소환이자 개발 지향적 도시의 질주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담겨있다.
〈바람이 가는 길〉에서 보는 것처럼 녹색을 주조 색으로 하여 숲의 이미지를 그려온 김건일에게 초록색은 청량한 여름날의 익숙한 장면이었지만, 작가는 문득 그 풍경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기억과 마음속의 이상적 관념의 표현이었다는 생각에 깨닫게 된다. 아름답고 싱그런 숲의 내부로 깊숙이 들어서면 그곳에는 외부에서 바라보는 것과는 다르게 온갖 미생물들과 곤충들이 미적 체험이 아닌 생존의 치열한 싸움을 위해 분투하며 서로 뒤엉켜 살아간다. 이것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생활 공간의 삶을 상징적으로 떠올리게 해주기도 한다. 이러한 숲을 화폭에 담아오면서 기억에 의해 각색되고 변형되어 온 숲에서 작가는 그 안에 묻혀있던 인간의 욕망을 발견하고 스스로 마음을 되돌아보는 작가의 마음 여행에 관람자들을 동참시킨다. 한국화를 전공한 작가는 물감을 바르고 그 위에 다시 바르는 중첩 방식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물감을 지우면서 여백을 살리는 방식으로 비워내는 작가만의 화법으로 화면뿐 아니라 마음을 비워냄으로써 초록의 대형 화면이 주는 시각적 즐거움과 작품 속의 의미를 동시에 음미할 수 있게 해준다.
한국화를 전공한 또 한 사람의 작가 정유미는 영국 유학을 기점으로 작품의 주제와 스타일이 크게 변화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어색한 소통에 담긴 시선과 몸짓 등의 사회문화적 현상에 주목했던 작가는 유학 시절 회화의 개념과 작품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나 재료의 물성 등을 탐구하기 시작하여 <부드러운 호흡>과 같은 몽환적 풍경을 창조 해냈다. 물론 이러한 풍경은 재현적 실경이 아니며, 작가가 주목한 것은 충실한 사실적 묘사가 아니라 화면에 등장하는 모티브를 표현함에 있어서 물감의 중첩에서 올라오는 발색 효과와 그 위에 한국화적 붓 터치의 정교하고 반복적인 도입으로, 비록 아크릴과 캔버스를 사용하지만 자신의 예술적 성장을 지탱해 준 동양적 화법과 구도 등을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가 여수나 강릉 등지에서 레지던시 기회를 가졌던 사실은 화면 속에서 부드러운 일렁임으로 나타나는 물결과 포말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들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다.
작가의 눈에 익숙한 장면이 가끔 낯선 공간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낯선 곳의 평범한 일상의 장면이 만들어 내는 분위기와 색상의 미묘함에 사로잡혀 그 장면을 사진에 담고 나중에 그것을 바탕으로 작업한 작가 가운데 국대호의 작품도 주목된다. 이번에 출품된 캘리포니아의 명소 <Nob Hill – 01>과 같은 작품처럼 특히 그 장소와 공간이 자신의 생활 거점에서 멀리 떨어진 외국인 경우에 작가는 사진을 통한 이미지의 포착과 그 이미지의 보존, 재해석 등의 과정을 거쳐 작품을 탄생시킨다. 작가의 화면 속에 제시되는 장면들은 작가 본인이 그곳에 체류하거나 여행한 경험이 있는 곳으로서, 관람객들에게는 평범한 일상의 한 장면으로 제시되지만, 작가 본인에게는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함축하는 기억 속의 한순간을 재현한 것이다. 따라서 이 지점에서 작가는 자신이 갖는 주관적인 경험의 특정성과 객관적인 시각 경험을 하는 일반 관람객들의 보편적 인식 사이의 괴리를 좁힐 수 있는 공감대를 생성하는 장치가 필요하게 된다. 그리하여 서로 다른 개체의 상호 교차와 접촉에서 발생하는 이질감과 마찰을 피하는 방법은 완충지대를 설정하고 작품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주관적인 경험과 관람자의 보편적 인식 사이의 완충지대로서 기억 속 이미지들의 초점을 흐리게 만드는 장면들을 표현하고 있다.
예술가들에게는 낯선 곳에 대한 호기심과 재구성된 기억이 작가의 창작 욕구를 자극하는 때도 있지만 일부 작가들은 자신의 일상 공간이 어느 순간 무심하게 다가오는 장면을 통해 창작 의욕이 불붙는 때도 있다. 송지연은 자신의 주변에 펼쳐지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공간을 따뜻한 시선으로 어루만진다. <종이 울리다>에서는 전형적인 산동네 서민들의 밀집 주거지를 바라보며 맨 위쪽에 자리 잡은 교회에서 종소리가 나는 듯한 순간의 장면을 차분하게 그려내고 있다. 작가가 본 것은 눈앞에 펼쳐진 언덕 위의 집들이지만 그림 속에서는 작가의 시각이 아닌 청각으로 감지하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이 작품은 김광균의 시 <외인촌>에서 “분수처럼 흩어지는 저녁 종소리”라는 구절이 떠오르는 시각과 청각의 공감각적 작동이 성공적으로 일어나는 작품이다. 일상의 장면을 스냅사진처럼 포착하고 그것을 기억하여 다시 작품 속에 담아내는 송지연은 이러한 도시의 풍경 속에서 포착되는 장면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통해 자아를 발견하는 작업을 계속해 왔다.
풍경화에 담기는 공간은 대부분은 실제 풍경을 재현적으로 담아내는 방식을 위주로 한다. 작가들도 자신의 주변 풍경을 작품 속에 담거나 기억이 그려주는 공간을 불러와 현재의 공간과의 대비 혹은 타협과 중첩을 시도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아스라이>와 <기억>과 작품에서 보는 것처럼 정영주도 어린 시절 봤던 한국의 서민적 동네와 달동네의 모습을 기억 속에서 꺼내 과거를 회고할 수 있게 해주는 마을 풍경을 그린다. 소재와는 별도로 작가는 풍경화에 쓰이는 일반적인 재료와 물감을 확장시켜서 만든 작품으로 폭넓게 주목을 받는다. 캔버스에 한지를 붙이고 그 위에 색을 겹쳐 올린 그림은 독특한 한지의 질감을 담은 작품으로 탄생하였다. 화면 안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마을은 집집이 창밖으로 퍼져 나오는 호롱불의 합창처럼 화면을 밝히면서 관람객의 향수를 자극한다. 작가의 의식 속에는 이러한 낭만적이면서 회고적 장면에서 자신의 지나온 시간과 자신에게 주어졌던 상황의 불가역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으며 그것이 관람의 생각과 정서를 자극하고 공유의 접점을 형성하는 지점에서 작품은 독특한 매력을 발산시킨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하고 안전이 깃든 공간을 찾아간다. 지방 도시의 인구소멸 시대에 젊은이들은 도시로 몰려가지만 정작 도시인들의 상당수는 역으로 도시에서 자연으로의 탈출을 꿈꾸기도 한다. 이상원은 도시에서의 여가 활동을 묘사하는 작업에서 출발하여 이제 그 도시인들이 자연의 품에 안겨 스키장이 조성된 설원으로, 그리고 탁 트인 바다가 그들을 품어주는 해수욕장에서 여가를 즐기는 모습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부감법으로 관찰하는 대형 화면을 그려낸다. 이번에 출품된 스키장의 낮과 밤 장면은 같은 장소가 다른 시간대에 연출하는 설원의 모습을 하늘 위에서 바라보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스키장의 부산함과 대조적으로 바닷가의 해수욕장은 모래사장에 삼삼오오 앉거나 걸어가고 있는 인물들의 모습이 묘사된 화면 하단부의 잔잔한 움직임에 대비하여 묘사가 최소화한 화면 중간부의 바닷물과 상단부의 하늘이 마치 색의 대조를 보여주는 색면 추상처럼 표현됨으로써 한 화면 안에 추상성과 재현성이 공존하는 흥미로운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 산과 바다에서 여가를 즐기는 군중들을 굽어보는 작가의 시선에는 부분적으로 제러미 벤담의 파놉티콘(panopticon) 시선이 주입되어 마치 누구 얼마나 숙련되게 스키를 타고 수영하는지, 또 그곳에서 누가 위험에 처했는지를 한눈에 지켜보며 작가가 공간을 지배하고 그곳에 개입하고자 하는 일종의 감시(또는 보호)의 시선을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 실제로 이상원은 스키를 취미 이상으로 즐기는 것으로 알려져서 화면 속의 인물들이 원경에서 대강의 모습과 동작을 보이는 그것 같지만, 스키를 타고 보드를 들고 가는 인물들의 동작을 자세히 주시해서 보면 아주 정확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우리의 생활 공간에서 익숙한 장면들을 담은 풍경화 공간에 대한 작가들의 사유적 반응과 그 장면에 역동적으로 참여하고자 하는 시선은 한 작품 속에서 선택적으로 혹은 동시에 이중적으로 교차하기도 한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공간은 평소에 무심히 지나치는 중성 환경이면서도 생명이고 역사며 삶의 필요충분 조건적 요소다. 길거리 카페, 비가 오는 거리, 늦은 시간의 정거장 등의 장소에서 문득 눈에 들어오는 장면의 익숙함과 낯섦은 작가들에게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에서 때로는 서정적 사유와 침잠을, 또 때로는 역동과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창작의 모티브로 작용하면서 그들의 시선을 매개로 관람객들도 자신들이 살아가는 공간을 호혜적이면서(reciprocally) 상반되게(conflictingly)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