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gments of Fantasy : New Perspectives in Landscape : 강유진

13 August - 28 September 2024

거시적 풍경 속 사적 시선

 

안소연 미술비평가

 

❉ 거대하고, 혹은 텅 빈, 하늘과 땅, 산과 물, 그 사이의 경계 어딘가를 서서 바라보는 어떤 이의 시선이, 화면 깊숙한 곳에서 시작되는 풍경과 한참이나 거리를 두고, 여기, 화면에서 아주 가까운 여기 어딘가에 놓여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강유진의 회화는, 나의 신체 앞에 활짝 열려 있는 창문처럼, 너무 크지도 않고, 너무 작지도 않은, 저 편의 공간을 바라보는, 여기 내 얼굴에 (촉각적으로) 맞닿아 있을 것만 같은, 한 사람의 시선에 의해 경험된 풍경 같다.

 

   하늘과 땅, 두 개의 영역 사이에 수직으로 솟아오른 산, 나무, 건물, 심지어 도로, 수영장 레인 조차 화면 속 소실점을 향해 솟아 있고, 저 그림 속 하늘로부터 화면 절반의 평면과 그 심연을 아우르는 물의 수면에 이르기까지, 강렬하고 화려한 물감의 농도는 중력을 향해 흐른다. 상승하는 형상들과 하강하는 물질이 충돌하는, 하늘과 땅, 두 개의 영역 사이를 교차하면서 그 경계를 지우는 이 움직임은, 뜻밖에도 고요하다. 마치 침묵처럼, 나뭇잎의 흔들림과 숲의 새와 물의 파동 조차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정적이 화면 전체를 덮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반짝거림. 투명한 유리창과 수면, 눈 덮인 산등성, 폭발하는 붉은 용암과 타오르는 불꽃, 땅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금속 조각 작품과 큰 수목의 작은 이파리들 사이사이에, 시선을 붙드는 반짝거림이 있다. 이 반짝거림을 지나, 저 형태의 윤곽에 닿을 수 있을 것처럼, 어떤 투명한 두께 같은 것이 나[그]와 풍경 사이에 흐릿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흐릿한 것이, 저 반짝거림인지, 풍경 속 경계인지, 나의 눈과 몸 사이의 간극인지, 모호함을 잔뜩 쥐고 저 그림의 가장자리에 드러나 있다.

 

❉ 강유진은 에나멜 페인트를 사용한다. 그림 속 경계를 지우는 섞임과 반짝거림의 두께는, 저 물질의 명료함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거기에 맞서, 흐르고 섞이는 강렬한 물성을 다루면서, 그는 어떤 형상으로 나아가는 붓질을 스스로 훼손하는, 물질의 흔적에 대응하는 제스처, 그 까다로움을 향해 주저 없이 다가갔을 지도 모른다.

 

   <Formal garden>(2024)은, 강유진의 회화에서 자주 보이는 풍경의 요소를 흐트러짐 없이 드러낸다. 화면 중앙으로 사라지는 소실점, 하늘과 땅의 몽타주적인 결합, 자연의 비정형이 이루어내는 울창함과 인공적인 건축물의 쾌적한 질서, 게다가 풍경화의 사실적인 윤곽선을 가로지르는 비현실적인 색채의 결합은 강유진의 회화가 지닌 양면성이다. 현실에서, 진부한 일상에서, 빈번하게 볼 수 있을 법한 풍경을 앞에 두고, 그는 이 진부함을 뚫고 드러나는 장소의 기원 같은, 일종의 비현실적인 수수께끼에 직면했을 수도 있다. 화면 속으로 사라져야 할 소실점의 자리에 가장 깊은 현실의 “어둠”을 그려 넣고, 그 안에서 유령처럼 빠져나온 색채같이, 초록의 반짝거림 밑에 검은 그림자의 얼룩을 흐르게 한다.

 

 

   <Oak Spring Garden>(2023)은 <Formal garden>과 닮았다. 같은 기원을 지닌, 서로 다른 두 개의 형상처럼, 소실점 자리에 위치한 어둠의 영역을 의심 없이 포갤 수 있다면, 그림의 가장자리로 빠져나올수록, 둘은 서로 다름을 쏟아낸다. 물은 땅이 되었고, 열대 식물의 우거짐은 질긴 넝쿨의 엉킴으로 옮겨졌다. 사실, <Oak Spring Garden>이 먼저 그려진 그림인 걸로 이야기 하자면, 둘 사이의 다름은 비선형적인 시간과 장소의 관계 안에서 수없이 그려졌다 지워지고, 눈 앞에서 목격되었다가 잊혀지기 쉬운, 기억의 장소 같다. 기억, 시간도 장소도 흐릿하게 어둠 속으로 소멸해 가는, 하지만 끊임없이 그곳을 향하는 무의식의 기원 같은 것 말이다.

 

   <Sculpture in the garden>(2024)은 더욱 수수께끼 같다. 베르나르 브네(Bernar Venet)의 거대한 금속 조각이 회화의 소실점을 가로막고 화면 중앙에 자리한다. 최근 강유진의 회화에는 이러한 조각 작품이 종종 등장하는데, 주로 그가 오랫동안 그려왔던 풍경 그림 속에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있다. <Oak Spring Garden><Formal garden>에서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소실점의 검은 “문”이 지워지고, <Sculpture in the garden>에는 공원과 광장에서 볼 수 있을 법한 거대한 스케일의 (녹슨) 철 조각이, 땅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수풀 사이에서 마치 중력과 무관하게 존재하듯 소실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또 다른 어둠의 소실점을 대체하고 있는 형상일지 모르는데, 현실 저 편의 영역을 시각화 하는, 숱한 윤곽과 경계선들이 수렴되는, 시간의 흔적과 장소의 경계를 축적하고 있는, 텅 비어 있는, 쉽게 규정할 수 없는, 조각의 내부와 외부를 가로지르는 (덩어리의) 양감을 감각하게 한다.

 

   <Maelstrom in nature>(2024)를 보면, 우선 그 제목의 구조가 눈에 띤다. 자연의 소용돌이, 하늘과 땅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텅 빈 공백의 장소를 잇는, 하늘로부터 하강하는 힘과 땅으로부터 솟구쳐 올라가는 힘이 만나는, 고요한 회화의 평면 위를 헤집는 저 조각의 반짝거림을 보자. 그것은 마치 강유진이 오래 전부터 풍경 회화의 질서 안에서 회화의 물질과 협력하여, 명료한 윤곽을 지워나가는 제스처와 색채의 지속적인 파열을 도모했던, 일련의 일들에 대해 다시 떠올려준다.

 

<Pool in the garden with fire>(2024)의 대비는 분명하다. 직관적으로, 물과 불, 파란색과 빨간색, 상승과 하강, 뜨거움과 차가움, 이러한 몇 개의 서로 상충하는 언어와 감각을 나열하기 쉽다. 이 무모한 결합은, 이 그림이 사실적인 풍경 회화라는 사실을 너머, 일종의 색채라는 것과, 그것을 다루는 신체의 제스처가 이 화면 앞의 공백을 뚫고 들어가 저 화면과 닿았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한다 에나멜 물감은 하염없이 흘러 내리고, 붓을 든 신체의 힘은 텅 빈 캔버스에 색채의 두께를 만든다.  

 

   <Sculpture in the pool with fire>(2024)에서, 이제 우리의 시각 경험은 사실에 기반하지 않고 어떤 물질적인 차원에 다가가 있다는 변화를 알아차릴 것이다. 수영장 바닥과 수면의 섞임, 조각의 표면과 빛의 얽힘, 불의 형상과 그것의 열기가 만들어내는 시각적 혼돈, 흘러내리다가 이내 무언가를 반사시키는 반짝거림으로 나타나는, 이 풍경의 비밀은 저 화면에 닿았던 신체의 촉각을 기억하는 순간에 서서히 드러날 것이다.

 

   그가 십여 년 전에 그린 <The Great New York State Fair>(2014)를 보면, 그가 거대한 풍경과 마주했던 순간의 경험을 솔직하게 환기시켜준다. 저 깊숙한 풍경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길의 무한함, 거대한 산등성의 동물적인 두께감,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의 흔들림, 마침내 (언젠가는) 물감의 반짝거림 속을 헤엄쳐야 할지 모를 수수께끼 같은 상상을 불러온다. 푸른색 물감이 화면의 어떤 틈새에서 계속 흘러내리고 있지 않은가. <Pool in the garden>(2024)에서, 검은 그림자로 채워진 그림의 소실점에서 화면 앞으로 헤엄치고 있는 사람의 움직임과 그것을 감싼 파란색 물감의 깊이에 닿을, 촉각적 감각에 대해 환기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 강유진의 개인전 《환상의 파편: 풍경의 새로운 시각》은 거대한 풍경 속에서의 사적 시선을 드러낸다. 그것은 이질적인 요소들의 병합과 상이한 제스처, 그리기와 지우기, 재현과 추상 등을 교차하는 동안, 역설적인 화면을 구축해냈다. 초현실적인 무의식이든, 현실에 내재된 지각과 경험의 잠재적인 주름이든, 강유진은 사실로서 존재하는 거대한 풍경에 균열을 내고, 그 틈새에서 상상할 수 있는, 어둠과도 같은 근원적인 장소, 그것을 강유진의 말로 표현한다면, 환상의 파편에 다가갈 회화적 구실을 찾는다. 그것이 모순이라 할지라도, 도리어 그 모순을 끌어안고, 회화의 양면성과 그 양면의 틈새에서 발견할 수 있는 회화적 경험을 기록한다. 시각적인 길들여짐을 낯선 것으로 전환시키고, 회화의 환영적인 공간 속에 거대한 스케일의 조각을 과감히 집어넣는 것처럼, 풍경[세계]과 나[신체] 사이의 감각을 감지하려는 그림 그리는 이의 속내를 가늠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