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iYeon Song : 송지연

29 November - 28 December 2024

‘미적 거리’의 실현을 위한 빌드업의 진가

 

이재언 (미술평론가)

 

오늘의 도시 면모는 불과 반세기 전의 것과도 많이 다른 것 같다.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역동적으로 치열하게 살아왔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도시의 변천사다. 하루아침에 신기루 같은 신도시 세우는 것을 초원에 게르 설치하듯 해치운다. 비좁은 땅에서 효율성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우리 사회가 고딕화된 오늘의 도시 풍경을 만들어냈다. 도시의 급속한 팽창으로 잠식된 녹지가 얼마던가. 많은 담론과 서사에서 화려한 겉모습의 이면에서는 독충과 독버섯이 자라나는 곳으로 묘사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삭막하고 비정한, 만만치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도시로 몰린다.

 

다행인 것은 우리 공동체의 역량 때문이랄까, 도시를 꽤 살 만한 곳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각종 인프라가 갖추어지면서 질서가 안정되고, 특유의 문화를 형성해나가면서 어느 사이 우리 도시들이 국제적인 인지도까지도 높아졌다. 로망을 갖고 도시를 떠나 전원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도시로 돌아오는 사례도 많다. 아파트란 것이 살기만 편한 것이 아니다. 공유와 사유가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공동체 속에서, 최적의 문화를 향유할 수 있다. 또한 비록 인공적이긴 하나 전원 못지않은 공원과 녹지까지도 갖추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낮이든 밤이든 바깥 활동이 원활한 안전한 곳이다. 역이민 사례가 늘고 있다는 점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만의 효율적인 도시화 모델은 도농(都農) 간의 격차를 줄이는 데도 역할을 하고 있으며, 나아가 외국의 도시화 프로젝트에도 참고가 되고 있다.

 

‘진경’의 전통을 중시하는 우리 작가들에게 자연만이 아니라 도시도 중요한 대상이다. 굳이 진경의 차원이 아니라 하더라도 공간적, 시간적 환경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특히 동시대인들 삶의 터전이라는 점과 주된 무대라는 점, 게다가 일상 속에서 갖는 경험의 상당 부분이 도시의 일상에서 오는 것이라는 점에서도 불가분의 관계로 보인다. 물론 작가들이 도시를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하다. 아무래도 콘크리트 친화적인 시각은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도시와 불가분의 관계인 송지연 작가의 경우도 끝없이 고층화되는 콘크리트 더미를 어두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림들을 그리기도 했다. 특히 건축중인 고층 건물, 단추 구멍만한 창만 가지런한 골조 상태의 회색 톤 그림들은 대단히 냉소적인 입장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끝을 모르게 올라가고 있는 건물의 층을 세다 지쳤다는 듯이 어떤 지점부터는 그리다 마는 듯한 화면들에서 작가의 심경을 헤아릴 수도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송작가의 그림은 두터운 여러 겹의 안료 마티엘 기초 위에 모델링이 이루어진다. 이는 자신이 원하는 표현을 위한 빌드업 과정이면서도 그 자체가 자기 그림의 시그니쳐이기도 하다. 흡사 콘크리트 레미콘을 한 트럭씩 부어 기초를 치고, 양생 전 미장 도구로 타르를 고르고 마감하기 직전의 거친 상태를 보인다. 빌드업 과정상의 행위와 마티엘 효과 등이 작가가 표현하는 도시라는 이미지와 무언가 통하는 것 같다. 과거 저돌적으로 파헤치고 짓고 하면서 안전 따위는 무시하던 공사현장의 삭막하고 거친 분위기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로써 멀리서는 웅장한 도시 풍경으로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그 속살을 보게 되면 거칠고 차가운 재질로 쌓아 올린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공사 현장의 고된 막노동 못지않은 노동력을 자신의 화면에 쏟아붓는 것이다. 단순히 두터움만을 위한 무작위의 칠은 아니다. 이러한 기초작업이 마무리되면 사실상 그림의 7할은 완성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수근의 마티엘 빌드업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공통점이라면 그러한 빌드업 과정에서 표면에 숨구멍 같은 것들이 생겨나면서 한두 번의 칠로는 구현하기 어려운 바탕 효과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전자에게서는 화면 마티엘이 화강암 석등이나 석불에서 볼 수 있는 도드락망치질의 잔다듬으로써 태고의 지평으로부터 생명이 기운이 느껴진다. 한편 송지연의 화면 토대에서는 갈필의 거칠고 메마른 흔적들이 여러 층 쌓여 표면 아래엔 마그마 같은 것들이 도사리고 있어 여러 번의 지각운동이 일어났던 것 같은 흔적처럼 지각된다.

 

이러한 토대가 작가 그림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보다 텍스추어 상의 디테일에서 나타난다. 다소 거칠고 각감적인 스트록과 스트록 사이의 숨구멍 같은 틈새에는 특유의 시각적 효과가 구현된다. 팔레트 상의 혼색으로는 낼 수 없는 중색효과와 굴곡, 음영, 명암 등이 다양하게 표출되는 마티엘이 펼쳐진다. 이는 표면의 명도가 높을수록 두드러진다. 그런데 이러한 효과들이 일정한 거리 뒤로 물러나서 보게 되면 심미적으로 감칠맛과 구수한 맛을 내는 토대가 되고, 최종적으로 도포되는 재현 이미지는 비기(祕技)의 노래이자 시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한 폭의 미니멀리즘 혹은 액션페인팅 같은 밑칠 작업은 도시의 이미지 자체를 심오하고 농밀한 서정성의 세계로 승화시킨다. 사실 산업화 혹은 개발 단계의 도시에 대한 인식이나 이미지는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으로 다루어졌던 것이 일반적이다. 빌딩 숲의 흉물스런 모습도 그렇지만 정서적으로 불안했던 도시의 일반적인 인상이 긍정적이지 않은 것은 개선이 되고 있다 해도 피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지연 작가는 도시 안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자 한다. 인물이 등장하지 않으면서도, 많은 도시인들의 모습이 상상 속에서 그려진다. 도시인들의 숨결과 에너지, 안정과 건강함을 갈망하는 도시인들의 보편적인 정서가 엿보인다.

 

작가의 그림이 빌드업 과정에서나 전반적인 색조 등에서 비판적이기보다는 ‘거리’를 보인다. 이데올로기 문제나 계급의 문제로 도시를 바라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정서적 측면에서 호감이나 쾌의 감정으로 접근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다분히 중립적이면서도 어떤 ‘거리’를 두는데, E. 벌로프의 ‘심적 거리’와 같은 유형이다. 요컨대 도시를 그리면서도 핵심은 ‘그 안에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데 있다. 사람을 그리지 않으면서도 사람이 상상되고 사람이 느껴지는 ‘휴머니즘의 그림’이라는 것이다. 사실 도시인들의 여러 가지 모습을 그릴 수도 있다. 작가의 데생이나 모델링 기량이나 보아 그것은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부재’의 역설이랄까, 부재 속 관조의 경험을 중시하며, 소통의 핵심인 것이다.

 

대부분의 화면들이 보통 잿빛의 무겁고도 흐릿한 공기나 진눈깨비라도 내릴 것 같은 추적추적한 날씨를 느끼게 한다. 게다가 어떤 명료한 형태이기보다는 모호하고 다소 불안정한 이미지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쾌청한 날씨보다 더 진한 농도의 감성과 아우라의 화면으로 감흥을 고조시킨다. 물론 작가의 풍경이 보다 밟은 명도와 채도로 화창해지는 등의 변화를 다양하게 시도하고 있기는 하다. 관조의 심도와 밀도를 위해 공간을 보다 개활 상태로 추구하려는 것에서 또 하나의 진전을 보인다. 작가가 최근 제주에 체류하면서 작업한 그림들이 바로 이것이다. 기존의 도시 풍경과는 다르다. 빽빽한 도시 풍경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탁 트인 허공과 여백이 유난히 많다. 여백이 많은 풍경이지만 여백에도 무언가 단조로운 허공과는 다른 에너지와 아우라의 공간으로 지각되고 있다.

 

송지연 작가의 그림들을 보면서 음미할 만한 대목이 재현과 기교의 문제이다. 사실 작가의 그림은 재현을 희석시키는 듯하면서도 가장 호소력을 가지는 재현의 하나이다. 워낙 독특한 마티엘이나 추상적 혹은 표현적 분위기 속에서 재현은 비교적 소극적으로 부각된다. 마찬가지로 기교 자체도 노련하고 능숙하면서도 그것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빌드업 과정에서 무작위로 수행되는 듯한 밑칠 필치들이 중색을 효과적으로 낼 수 있도록 조율하는 것 자체가 세련된 기술이자 기교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우연을 가장하면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우현 고유섭의 명제를 조회해 본다. 우리 전통미의 특징을 ‘무기교의 기교’라 역설했던 우현 고유섭의 명제. 뭐든 계획 없이 대충 한 것 같지만, 계획이든 기교든 숨기는 것이 미의 첩경이란 것을 우리 전통에서 간파했다는 것이다. 송지연 작가의 경우 무심코 투박하게 기초를 다진 것 같지만, 진면목은 이면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관객과 작품 사이에서 보이는 감정의 흐름은 흡사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비슷한 데가 있다. 처음엔 뜨겁다가 만남이 거듭되면서 관심이나 애정이 급속히 식는 경우가 많은 것은 작품이나 사람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볼수록 심미적 경험이 심화되고 두터워진다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지만, 송지연의 작업들이 이에 해당된다. 노동집약적인 아날로그 타입의 장점이면서도 그 이상의 것이 있기 때문이다. ‘평범함’ 혹은 ‘진부함’ 속에서 큰 울림을 주는 비결, 복잡하고 미묘한 미의 세계에서 이상과 현실을 적절히 조화시켜 영감을 고조시키는 해법, 바로 그것이다.